<돈존>: 남자는 모두 야동중독인가? 19금 영화들

"형제님의 죄를 말씀해 보세요."

"지난 일주일 동안 혼전관계를 두 번 맺었고 야동을 보며 17번 자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용서해 주십시오."

"열번의 주기도문과 열번의 성모마리아에게."

"감사감사, 신부님."





여기 존이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와...진짜 잘생겼네요...

신이 있다면 좀 나와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미쳤습니다.

같은 남자로서는 부러워 죽을 미친 능력이 있죠.

클럽에만 갔다하면 무조건 여자를 한 명 꼬셔서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역시 여자나 남자나 예쁘고 잘생기면 장땡입니다.

헬조선의 외모지상주의?

세계 어딜 가도 똑같습니다.

잘생기고 예쁘면 뭔들.......

신이 있다면 빨리 좀 나와보라고 하고 싶네요.

이왕이면 좀 뒤에서 보자.




어쨌든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온 조토끼!!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켭니다.

전 그 때 여자를 메르시 장인으로 키우려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여자랑 밤을 지새우더니 야동으로도 밤을 지새웁니다.


영화를 보던 저는 이해가 안 갔습니다.

"왜 메르시 장인으로 키우지 않는 거지? 겐지충에겐 메르시가 필수라구!!!"


그런데 이 남자는 알고보니 야동 중독이었습니다.

하루에 혼자서 11번까지 해봤다고 합니다.

글쎄요, 저는 하루에 솔큐로 최고의 플레이를 6번 한 적은 있어도 11번 한 적은 없네요.

반성해야겠습니다.


확실히 조토끼 조토끼 하더만...역시 토끼라서...아닙니다...하하...


어쨌든, 이 남자. 존.

얼마나 여자를 잘 꼬시고 집으로 잘 데리고 오는지 친구들마저 '돈 주앙'이라는

고대의 카사노바 아재 이름까지 가져와 '돈존'이라고 칭호합니다.

그런데 이 새X는 야동에 푹 빠졌습니다.

스칼렛 요한슨이랑 하고도 야동이랑도 한 번 더 합니다.

크아아아악!!!!!

정말 이때 저는 피를 토할 지경이었습니다.

스칼렛 요한슨으로도 만족을 못 하면 넌 누구랑...ㅂㄷㅂㄷ





아...스칼렛...



아...주홍빛 요한슨...




와....갓한슨...스갓렛....




그런데 이 남자의 논리가 여간 그럴싸 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현실과 야동은 달라요."

맞는 말입니다.

기획물 야동을 따라했다가는 당신은 곧장 철컹철컹 ㅂㅂ~



아무래도 현실에선 여자를 위해서 각종 사전작업이 필요한 법이죠.

남자는 바로 불타오르는 폭죽이 되어도 여자는 저온숙성과 같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이죠.

이 과정에서 존의 말로는 '남자가 희생할 바에야 내가 희생하지 않아도 쾌락을 주는 야동이 최고다!!!'라고
말하죠.




하지만 스칼렛 요한슨 앞에서는 그래선 안 돼, 이 개XX야!!!!!!




스갓렛 요한슨 앞에서 야동이나 보고 있으니까 썸머같은 여자한테 차여서 엉엉엉 울고 처자빠지는 겁니다.


스갓렛 요한슨이 청소 하지 말고 야동 보지 말라면 당연히 안 하면 되는데 굳이 해서 하늘을 걸어갑니다.

여러분, 치킨이 진리이듯이 스갓렛 요한슨도 진리입니다.
설리만 진리인 게 아니에요.
설리는 이제 진리에서 한발짝 물러난 것 같습니다... 아 최자...


어쨌든 스갓렛 요한슨이랑 헤어집니다.
결국 존은 스갓렛 요한슨이랑 헤어집니다.
이런 놈은 비오는 날에 섭씨 28도까지 올라갈 때까지 맞아야 합니다.

그러다 남자는 많이 연상이신 줄리안 무어 누님을 만나서

진정한 참사랑의 결실에 대해서 깨우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집중하며 세상 속에서

그녀와 나만이 있다고만 느끼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 전까지 그가 야동에만 집중했던 이유는 파트너가 필요 없이

오직 자기 자신과 컴퓨터만 있으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니죠.


그런데 이 영화는 이미 출발부터가 엄청난 모순입니다.

스갓렛 요한슨이 있는데 어딜 집중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조토끼, 이거 안 되겠어.

<인셉션>에서 엘렌 페이지랑 키스할 때부터 맘에 안 들었는데...


영화는 야동과 사랑 그리고 스갓렛 요한슨이라는
사랑의 필수 3요소를 가지고 다루는데요

과정 자체가 빠른 편집으로 쉭쉭 흥미롭게 잘 지나가고

소재도 재밌는지라 아주 좋은 킬링타임용이 됩니다.

마지막 엔딩은 소소한 사랑의 결실이라는 여운적인 엔딩을 주면서

엔딩 크레딧은 시끄러운 디제잉 음악으로 깔아버리니까

마지막 엔딩의 여운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라구요.

조토끼가 각본 감독 주연을 도맡은 영화인데

마지막 엔딩 크레딧 음악은 좀 미스인 것 같습니다.


조토끼라는 이름값에 어울리게 제대로 정력자랑을 한 영화인 것 같습니다.

조토끼는 이 영화 캐스팅을 할 때 스갓렛 요한슨이 되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을 겁니다.

하아...덕분에 기분만 꿀꿀해집니다.

돈존이 되지 못한 남자의 <돈존> 리뷰였습니다.



결론 : 조토끼 개새X.

스갓렛 요한슨 엉엉 날 가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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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여성들의 삶은 지금 어떤가요? <포제션> --------------------------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곳에 있다. 정원과 나무

나무뿌리에 뱀, 황금과일,
나뭇가지 그늘 속의 여인
흐르는 물과 푸른 공간.
그것들이 그 곳에 있고 예전에도 있었다.
고대세계의 경계에 헤스페리데스의 숲 속에서, 영원의 가지 위에서 과일이
황금빛으로 빛났고, 그 곳에 용 라돈이 보석으로 빛나는 볏을 곧추 세우고,
황금발톱을 문지르고, 은빛 이빨을 날카롭게 세우며
졸았고, 영겁의 시간 속에서
교활한 영웅 헤라클레스가
용을 축출하고 황금과일을 빼앗으로 올 때까지 기다렸다.
                                                                                         - 랜돌프 헨리 애쉬
                                                                                           <프로세르피나의 정원(1861)>

영화 <포제션>은 1990년 A.S 바이어트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기네스 펠트로의 주연으로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다크나이트>에 나왔던 '하비 검사(투 페이스)' 역의 애론 아크하트도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위의 시는 동명소설에 나오는 시입니다. 1장 1절에 나오는 시로 <포제션>은 이 시로 먼저 그 신호탄을 쏩니다. 소설 <포제션>은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더불어 완독하기 어려운 소설로 실제 여류소설가이자 영문학박사인 바이어트 교수의 창작시와 문학비평이론의 집성체로 소설은 그 상징과 의미적인 면에서 상당히 깊어서 단숨에 이해하긴 힘듭니다. 그렇지만 영화 <포제션>은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문학비평이론들을 최대한 덜어내고 창작 시도 몇 편만 활용하여서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로 그려냅니다.

"롤랜드 미첼(애론 아크하트 분)"은 영문학 박사로 블랙커더 교수의 밑에서 조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영문학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서 담당교수는 물론 다른 교수들로부터 무시를 종종 받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 도서관에서 비코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주 연구분야인 "랜돌프 헨리 애쉬"를 탐구하던 중 한 개의 장문의 편지를 발견합니다. 랜돌프 헨리 애쉬는 절제된 사랑시로 유명하였고 부인만을 바라보고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해왔다고 알려져 왔었는데 롤랜드는 애쉬가 부인이 아닌 다른 여성에게 열정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두 장의 장문편지를 도서관에서 훔쳐서 그는 새로운 발견을 했다고 생각하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합니다. 연구를 시작하면서 애쉬가 열망한 여인은 "크리스타벨 라모트"라는 당대의 진보적 여류시인임을 알게 되고 라모트를 연구하는 "모드 베일리 박사(기네스 펠트로 분)"와 같이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애쉬와 라모트의 로맨스, 미첼과 베일리의 로맨스. 그리고 이 발견을 탐내는 다른 교수들의 개입이 섞이면서 영화는 진행이 됩니다.


이처럼 영화는 문학비평이나 시, 신화, 상징론과 같은 어려운 측면들을 제외시켜서 남녀간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와 원작소설에서나 인물들의 성격과 특성은 거의 반영되어서 영화도 훌륭한 영화화의 모범이라고도 불리며 명작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제일 주목할 만한 관점은 이 작품 속을 관통하는 [페미니즘]입니다.
페미니즘(Feminism)은 '여성해방 이데올로기'를 말합니다. 기존의 남성의 여성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여성의 양성평등 및 여성권리의 신장을 주창하는 용어로 이 작품의 페미니즘의 대명사 격인 캐릭터는 '크리스타벨 라모트' 입니다.

크리스타벨 라모트가 살았던 시기는 19세기 후반 유럽의 낭만주의,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현대 여성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현대 여성들의 삶은 어떤가요?

태어나면 이름을 받고 출생신고도 똑바르게 되고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의무교육 과정을 거치는 것은 물론 대학교에 진학을 합니다. 그리고 성인이 된 여자는 투표권도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자유연애는 물론 자신의 의견 표시, 사회활동, 취직, 대학원 진학 등 남성이 행할 수 있는 모든 행동과 동등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여자에게 성차별을 행사하는 사람이 처벌을 받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사회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요?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여성의 투표권이 인정된 것은 1922년.
투표권을 준다는 것이 한 명의 정당한 성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으로 볼 때 진정한 여성의 권리 인정은 90년 정도입니다.
실제로 중매나 선을 통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닌 자유연애를 하거나 골드미스로 사는 것도 불과 50여년의 세월에 지나지 않습니다.
1960년대 이후 파급적인 피임 기술의 발달로 본격적으로 커리어우먼과 골드미스가 시작된 것도 50년 남짓입니다.





표면적으로 세상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흐름이 시작된 것은 얼마 되지도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스마트폰과 인터넷 아닌가요?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상용화가 시작된 것은 1992년 유럽의 CERN 연구소에서 '월드 와이드 웹(WWW; World Wide Web)' 을 개발한 이후부터입니다. 이제 겨우 21년. 그런데 이제 인터넷은 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존재이며 없어지는 순간 전 세계에 혼란을 줄 정도로 사회와 세상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습니다. 스마트폰도 최초로 나온 것은 미국 BellSouth사에서 1994년에 출품한 것으로 아이폰과 갤럭시의 열풍으로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상용화 된 것은 2007년 1월 9일입니다. 그런데 국민의 70%가 넘는 비율로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현대 여성의 자유로운 삶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다면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상은 정반대의 위치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당시 영국의 여성은 두 가지 부류 중 하나였습니다.

Angel in the House or Mad woman at the Attic
집안의 천사 혹은 다락방의 미친여자




대표적으로 보여준 소설이 영국 여류작가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일 것입니다. 실제로 <제인 에어>에는 다락방의 미친여자가 로체스터 백작의 집안에 돌아다니죠. 이 당시 여자들의 삶은 예의바르고 온순한 여자이며 집 안을 지키며 성욕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온순한 여자입니다. 이것을 지키지 못 하면 다락방의 미친여자가 되어서 감금되거나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데 혼자서 살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가졍교사Governor'인데 이것에 대한 시선이 좋지도 않았고 수입도 크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자 혼자서 살기란 불가능하고 남자가 집안의 가장BreadWinner가 되는 것이 빅토리아 시대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런데 크리스타벨 라모트는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 이 작품의 페미니즘이 팍팍 드러납니다.
라모트는 블랑쉬라는 여류 화가와 같이 사는데 동성애자입니다. 라모트는 정확하게는 양성애자입니다.
이렇게 이 당시에 여자 두명이서 같이 사는데 라모트는 동성애에 대한 성욕도 확실히 드러냅니다.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구요. 그리고 진보적인 여류시인으로 자신의 시에 여성의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도 삽입하여서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듣습니다. 여기에 랜돌프 애쉬는 좋게 평가를 하구요.


애쉬와 라모트가 밀애여행을 하면서도 라모트는 애쉬를 향한 마음을 확연하게 잘 드러냅니다. 오히려 애쉬가 밀애의 불안함에 떨 때 자신이 위로해주는 남성적 역할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라모트의 모습은 '이브EVE' 와 같습니다.

성경의 태초 신화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
맨 처음에 나오는 시에 정원과 나무가 나오는데 이 정원은 에덴동산을 말하며 나무는 사과나무를 말합니다.
사과는 선악과(善惡果)로 원죄의 상징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브는 아담에게 사과를 먼저 먹으라고 권해주는 적극성을 보이는데 여기서 부정적인 시각은 여성이 원죄의 원인이라는 점도 나오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여성이 남성을 이끄는 행동의 주체로도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라모트는 그 행동의 주체를 작품 속에서 드러냅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라모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왜냐하면 당대의 여성 압박 사회 속에서 애쉬의 아이를 낳아도 자신이 키울 수가 없기에 따로 다른 집에 아이를 맡기고 자신은 친엄마라는 사실을 숨긴 채 그 집에서 딸을 키우며 살아가고 죽습니다. 결과는 비참했지만 그럴 용기와 힘이 있었다는 것.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라모트의 페미니즘 적인 것도 보입니다. 현대에서 베일리 박사는 머리를 항상 올려서 묶고 다니는 남성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고 애인이 묶고 다니라는 말에 순종하는 순종하는 여성상을 표방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머리를 내리는 것도 미첼 박사가 내리는 게 어울리다면서 내리주지요. 베일리 박사와 라모트는 비교가 됩니다.




이 작품은 또한 1990년대 작품인 만큼 포스트모더니즘 적 관점도 가지고 있는데 일단 랜돌프 애쉬와 크리스타벨 라모트는 작가가 창조해낸 허구의 인물입니다.

허구의 인물에 대한 문학비평은 일반 모더니즘에서 탈피를 하는 것입니다. 왜곡된 지식의 편향과 전승이라는 점을 전달하는데 이에 대한 비판하는 장면이 영화 속에서 종종 나옵니다.

블랙커더 교수가 롤랜드 미첼에게 애쉬의 딸기잼 단지 개수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리는 데 이것은 영문학에서는 새로운 것이 거의 없는 풍조이며 쓸데없는 것에 매달려야 한다는 학문 기조를 비판하는 대목이 영화에서도 나옵니다. 그런 블랙커더는 미첼의 발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요. 결말에서도 미첼과 베일리 박사는 애쉬가 자신이 딸을 만나지 못 했다고 결론 짓지만 영화 에피로그에서 애쉬는 프랑스에서 라모트를 찾다가 라모트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들판에서 우연히 만나고 그 애를 통해 시를 라모트에게 전달하려 하지만 아이는 놀다가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종이는 바람을 타고 사라지면서 영화는 아이가 저 멀리 뛰어가는 장면과 함께 끝납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이 완전한 지식이 아닌 불완전한 지식인 것을 보여주는 에필로그로 이 또한 불완전함이 곧 완전함이며 완전함도 불완전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적 패러다임을 보여줍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역사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현대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보지만 과거에는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에피소드라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랜돌프 헨리 에쉬라는 인물은 추측하건데 빅토리아 시대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로버트 브라우닝은 아내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을 위해서 여러가지 사랑시를 썼고 아내에게 죽을 때까지 충실했다고 합니다. 소설처럼 불륜을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건데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문학으로는 <지킬박사오 하이드 씨>와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있었는데 이는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추악하다는 인간의 내면과 겉으로만 화려한 당대 사회를 비판했다는 비평도 있는데 <포제션>이 낭만주의 시인을 소재로 삼아서 실제로는 불륜을 저지른 한 시인을 꼬바른 것도 포스트모더니즘적 성향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영화 제목이 <포제션>이기도 한데 이 영화 제목의 의미는 사랑의 소유라는 측면도 있고, 영화에서는 크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애쉬의 편지와 유품을 둘러싼 소유욕에 가득찬 인물들의 투쟁이 나타나기도 하고 미첼의 소유욕을 보여주는 대목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극 중에 크로퍼 라는 교수가 나오는데 돈이 많아서 경매장에서 각종 애쉬의 유품들은 물론 다양한 아티팩트들을 삽니다. 그는 1차적 소유를 하는데 극 중에서는 거의 악역으로 작가의 현대물질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소유는 지식적 학식적 소유로 "교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지요.


롤랜드는 영화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원작에서는 박탁감과 자괴감의 소유자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인이라는 입지에도 불구하고 영문학 박사학위를 가졌지만 물질적으로 뷰유하지도 않고 학식적 입지도 거의 없고 베일리 박사와의 공동연구를 하면서 베일리 박사에게 업적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소유에 집착하는 인물입니다. 작가는 롤랜드라는 주연인물을 통해서 "진정한 소유"에 대한 의문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랜돌프 헨리 애쉬는 1850년대를 주로 활동하는데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온 해로 과학은 신에게서 인간을 분리시킨 해입니다. 창조론은 인간이 곧 신의 소유물이라는 것이었지만 진화론이라는 것을 통해서 인간은 결국 신의 소유물이 아닌 자기 자신적 주체라는 사실을 주장한 과학적 이론이지요. 서두에 등장한 시도 신과 인간의 투쟁을 그리고 여성을 투쟁의 주체로 보았지요. 또 제목 소유가 의미하는 바는 신과 인간에게서 분리한 인간정체성과 인간주체의 자기소유라는 측면도 띄고 있습니다. 파고 팔수록 정말 다채롭고 어려운 작품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처럼 어렵네요 정말.


라모트의 삶을 들어보면 포제션이란 그녀를 통한 "페미니즘적 삶의 소유". 모든 여성들이 원하는 삶의 의지이자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그녀가 실존인물이며 현대의 모습을 본다면 만족할 지 더 나아가야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대의 여성들은 라모트처럼 사회의 억압적인 패러다임이 원인이 되어서 비극으로 치닫는 결말을 맞이하지는 못 할 겁니다.




저는 뭐 페미니즘 보다는 남성다움에 좀 더 주목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대두되고 확산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남자들은 5000년 지배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한 번 되돌아보는 경향을 가지고 진정한 남성다움이란 뭔지 고민을 해야한다고 생각해봅니다. 단순히 여성을 존중하는 것이 남성다운 것인지 아니면 여성을 독립적 개체로 두고 <파이트클럽>이나 <겟썸>처럼 신체적 남성다움을 좀 더 추구해야하는 건지.



P.S 서두에 등장한 시의 원문


These things are there. The garden and the tree

The serpent at its root, the fruit of gold

The woman in the shadow of the boughs

The running water and the grassy space.

They are and were there. At the old world's rim,

In the Hesperidean grove, the fruit

Glowed golden on eternal boughs, and there

The dragon Ladon crisped his jewelled crest

Scraped a gold claw and sharped a silver tooth

And dozed and waited through eternity

Until the tricksy hero Herakles

Came to his dispossession and the theft.

                                                          - Randolph Henry Ash From <The Garden of Proserpina>, 1861



P.S 결말에서 기네스 펠트로가 머리를 푸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네스 펠트로는 머리 올린 게 더 예쁨. 정말 신기함. 머리카락이 오히려 그녀의 미모를 방해하다니...대단하다 기네스 펠트로 ㅋㅋㅋ

아님 그냥 내 취향차이인가?? ㅋㅋㅋㅋ




참조문헌 : http://millenione.blog.me/120056008053

               <The possession>

이미지출처 : 다음 영화




영화에세이 : <딸기100%> 속 공감과 분석 그리고 <벨 아미><포제션> --------------------------


이 만화책은 야하다.
2002년~2005년 내외 시기에 청소년 남학생이었던 사람은 누구나 읽은 만화책 <딸기 100%>.
이 만화는 일본 망가로 2002년에서 2005년까지 주간소년점프에 연재한 인기만화였으며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2000년대 초반에 만화는 웹툰보다는 인쇄물 및 정기간행물 만화가 대다수였으며 인기를 모은 것도 간행물 만화였다. 물론 스캐너의 등장과 인터넷 공유프로그램(P2P 프로그램 : 프루나, 당나귀, 피디박스 등)으로 만화계의 침체기가 본격적으로 왔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당시에 나는 중고등학생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남중남고를 나왔다. 다행히 공대는 안 갔다. 머리가 자연과학 이과계통으로 굴러가지 않은 것은 살기 위한 수컷본능이 아니었나 싶다.
남중남고를 다니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 이 만화책 <딸기 100%(이하 <딸기>) >이다.
총 19권의 완결본이 있는데 굳이 [19] 라는 숫자로 완결을 지은 것은 정말 작가의 센스(?)일까??




<딸기>는 고교생 마나카 준페이가 이즈미자카 고등학교에서 겪는 사각로맨스이다. 이웃 오우미 여고에 다니는 여고생 '니시노 츠카사', 마나카와 같은 학교인 동창생 '토죠 아야' 그리고 '기타오오지 사츠키'. 마나카 준페이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이즈미자카 고등학교 영상연구부를 친구와 같이 만들어서 영화를 만들면서 꿈을 키워나가고 그 외 남자의 다른 부위(?)도 크게 키울 여러가지 야한 상황에 처하면서 4각 관계로 치닫는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 만화책에 정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야하지만 그 선을 넘지 않는 그 아슬아슬한 상황에 치고빠지는 오묘함과 절묘함이 정말 간질거려서 재미는 물론이고 시각적인 만족감(!)을 선사해줬기 때문이다. 인체의 부위 5% 빼고는 보이는 상황들이 봇물쏟아지듯 나오니 그 시각적쾌감은 절묘하다 그러면서도 노골적이지도 않고 퇴폐적이지도 않고 도를 넘은 선정성은 없다.

대학교에서 와서 우연히 이 만화책을 다시금 한 번 더 읽을 기회를 가졌다.
시험 기간에 이게 무슨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푹 빠진 적이 있어서 그 때의 감상은 다시금 거의 완벽하게 되살려졌고, 현재의 감상은 이 글을 쓰기 전에 완성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의 감상은 단순히 4각 관계의 로맨스에서 오는 아슬아슬함과 인물들의 미모에서 감탄만을 했다. 물론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있는 소년판타지라는 것을 감지는 했지만 새삼 3명의 미인들에게 둘러싸인 주인공에게 부러움과 동경을 가졌다. 실제로라도 일어나면 좋을 듯 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 히로인 '니시노 츠카사' 의 매력에 빠져서 이런 여자를 만날 거라고 다짐을 하였다.

대학생이 되어서 군대도 갔다오고 나서 읽어보니 정말 이 4각 관계는 정말이지...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자중지란 적인 관계는 정말 "만화는 허무맹랑하다." 라는 누군가의 지론에 정말 비판할 여지를 없게끔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의 진정한 연인관계의 선을 넘는 상황들이 여러번 반복되는데 그 상황에 못 넘어가는 남자나 못 넘어가게끔 만드는 상황이나 둘 다 모두 비현실적이며 얼토당치 않으며 3명의 경국지색 화용월태 절세미인이 한 남자를 3년동안 좋아한다는 상황은 비현실을 넘어서 부조리함과 불성립이라는 어휘말고는 나오지가 않는다.

정말 사춘기 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스토리였다. 인물구도와 여성을 활용한 면에서도 정말 사춘기 소년만의 이야기이다.
지금와서 읽어보니 나도 과거에는 이 허무맹랑한 스토리에 빠져들은 한 명의 몽정기 사춘기 소년이라는 사실을 정말 극명하게 깨달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인용구로 나의 과거를 마무리지을 수 밖에 없다.





"What is done is done, What is past is past.(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며 과거인 것은 과거인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마나카 준페이가 니시노 츠카사라는 여성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하고 탐구를 해보았다(고딩때에는 생각도 안 해보았는데 지금은 할 수 있다). 모든 작품에는 포인트가 있으므로 그 포인트를 탐구하였다.

고등학교에서 아이돌로 불리며 얼굴, 몸매, 성격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세 명의 미소녀.

근데, 생각해보니까 허구의 인물이라지만 미성년자(특히 교복 입은..) 라서 민감한 주제이긴 하다.....






일단 토죠 아야.



이 여자애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문학소녀이다. 주인공과도 자신이 수학 노트에 적은 소설로 인연이 시작되어서 자신의 진로를 소설가로 정하고 소설가로 등단하기까지 한다. 매우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지만 나긋나긋하게 말도 잘 하는 조신한 여성이다. 전형적인 전통 여성상의 표상이다.

하지만 이 여자애는 이제 보니 이상한 면모가 보인다.
첫번째로, 이 여자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단순히 한 남학생에게 걸었다. 바로 주인공 마나카에게.
극중에서 토죠 아야를 좋아하는 '야마치'라는 동급남학생이 토죠 아야에게 다음과 같이 따끔하게 질타한다.



토죠 아야는 사실 원래부터 예쁘진 않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양갈래 땋은 머리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다니고 내성적이다보니 존재감이 희미한 학생이었는데 마나카 준페이를 만나고나서부터 자신의 재능도 깨닫고 사랑이라는 감정도 깨닫고 자신을 꾸미는 방법도 알게 된다. 마나카 준페이를 통해서 친구들도 얻게 된다.
그러다보니 토죠 아야는 마나카 준페이에게 전적으로 심리적 의지를 하게 된다. 이 심리적 의지는 단순한 멘토나 친구를 넘어서 짝사랑으로 발전하고 마나카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면모까지 보인다. 고3 수험생이어도 마나카의 영화촬영에 주연배우로 발 벗고 나서 활동을 하는 가하면 마나카의 모든 부탁에 수긍하고 편들어준다.


마치 [각인이 된 어린 새] 같다.
재능을 발견하여서 소설가라는 진로를 개척하고 고교 졸업 이후에 마나카가 떠나가자 자신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는 긍정적인 결과도 보이지만 19권이의 스토리에서도 그 각인은 결코 벗어나지 못한 듯 하다. 여전히 마나카 준페이를 향해서 의미 모를, 본인만 알 듯한 홍조를 얼굴에 띄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각인적인 사랑은 집착의 면모를 보인다.
토죠 아야는 소극적인 여성이다. 전통적인 여성상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나긋나긋하게 말을 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자신의 감정이 상해도 화를 낸다던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남의 입장과 감정에만 맞추어서 이야기한다. 특히 마나카 준페이의 감정과 입장을 헤어려주는 말을 많이 한다.


지금 보니 이상한 면모가 보이는데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과 같다.
나비 부인은 미국 해군 중위 핑거튼 대위가 결혼한 일본 여성, 초초상이다. 그런데 핑거튼 대위는 떠나고 나비 부인은 임신한 아이를 낳고 3년동안 아이를 홀로 키우며 핑거튼 대위를 기다린다. 그리고 핑거튼 대위는 떠난 지 3년 만에 돌아오는데 원래의 본처와 함께 돌아왔고 나비 부인이 키운 아이를 데려간다. 그 후 나비 부인은 자살을 한다.

토죠 아야는 이런 여성상에 완전부합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부합하는 면이 있다.




<나비 부인>에서도 나비부인 초초상은 핑거튼 대위에게 이미 아내가 있음을 보아도 크게 격노하지도 않고 크게 동요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면모가 비슷하게 만화에서 보여지는 부분이 있는데 <딸기> 초반에 마나카와 사츠키와의 친분이 쌓이며 질투를 느껴도 마나카에게 자신의 감정을 절대로 비추지 않는다.


마나카를 따라서 이즈미자카 고교에 왔는데 그 이유는 마나카와 같이 영상연구부를 같이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마나카는 의외로 영상연구부를 사츠키에게 먼저 하자고 말한다.



<나비 부인>을 비교한 것은 지나친 감은 있지만 순종적인 여성상의 일면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각인적 사랑의 비정상적인 면모는 후반부에 절정을 달린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른 여자를 소개시켜준다. 입시학원에서 만난 '무카이 코즈에'라는 여자애다.


정말 지금와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어째서 3년 동안이나 잘 지내온 남자에게 다른 여자와의 데이트를 주선해 줄 수 있을까?



무카이 코즈에와는 절친한 우정이 있는 여자애도 아닌 그냥 학원의 아는 여자애일 뿐이다. 물론 코즈에는 아야의 짝사랑을 모르지만.

마나카 준페이를 믿기에는 그의 주변 여자들 관계를 보건대 분명 코즈에에게도 잘 대해줄 것이고 남녀 간에 다른 감정이 싹틀지도 모르는 것이다.
수동적인 여성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토죠 아야는 마나카 준페이가 니시노 츠카사와 사귀고 난 이후에도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심지어 다음과 같은 행각을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젊은 시절의 폭풍적인 사랑이기도 하며 결혼한 유부남과의 간통도 아닌, 어찌보면 합법적인 로맨스이기도 하다.


나중에 대학교 졸업 이후에 만나서도 토죠는 마나카에게 다음과 같은 표정을 짓는다.



물론 마나카가 토죠 아야의 고교시절 소설을 영화화하겠다는 다짐에 흐뭇해하는 감정표현일 수도 있지만 어찌보면 그 때의 감정의 재현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건 그녀는 자신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소극적이고 당당하지 못하고 올곧지 못한 자기자신때문에.





'기타오오지 사츠키'라는 인물은 매우 독특한다.


당시에는 '어우, 뭐 이런 여자애가 있지?' 라면서 정색을 했던 반면에
지금은 '아우, 이런 여자애 어디 없나?' 라고 생각이 든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남성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여자다.
당당을 넘어서 당돌하며 노골적이며 솔직하다. "좋아해.' 라는 서슴없이 먼저 하는 직설적이며 좋아하는 남자에게 기습키스를 먼저 할 정도로 감정표현에 솔직하며 좋아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옷도 벗는(!!!) 아주 당찬 여자이다.



아 물론, 이 만화책에서 몸매가 아주 좋다. 넘버원이며 나머지 여자들은 올킬이다.

자신의 몸매와 얼굴의 매력이 폭포쏟아지듯하여서 수많은 남자들의 대쉬가 있어도 한 남자만을 바라보는 지고지순 순정파이되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라도 지는 것은 싫어하여서 언제나 적극적이며 진취적이고 과감한 스킨쉽을 감행하면서도 얼굴을 가득 홍조를 띄고 속으로는 떨고 있다고 말하니...
지금의 나로서는 정말 이런 여자가 온다면 정말 감사한 상황이다.
대부분의 남자가 그러지 않을까 싶다. 폭풍 몸매와 초절정 미모에 적극적이면서도 순정을 지키고. 그리고 옵션으로 백치미도 추가요. 고교 졸업 이후에는 전통음식점을 물려받으며 조신함도 갖추게 된다.

사츠키라는 인물은 토죠 아야와 같은 전선을 밟는다.
바로 집착이라는 형태이다.

마나카가 갈팡질팡하며 이리저리 여자들을 저울질하여도 자신이 저울질을 당하여도 이를 오히려 기뻐한다.


어느 누가 자신이 비교당하며 자신을 갈팡질팡하게 만들며 고교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연애감정을 소모하게 만드는데 기뻐할까?

사츠키라는 인물도 결국 당당함이라는 페르소나로 포장된 토죠 아야의 형태일 뿐이다.
당돌하며 적극적인 나비부인이냐 아니면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나비부인이냐의 차이일 뿐인 것이다.

이 두 명의 본질은 똑같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두 명의 사랑형태를 놓고 보면 마나카 준페이의 우유부단함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된다. 결코 이해가 되기는 어렵지만.
두 명의 사랑이 집착의 형태가 있으니 마나카로서는 급하게 내세울 것도 없는 아주 좋은 물고기인 것이다.
두 명의 레벨을 빗대면 물고기를 넘어선 범고래와 같은 대형포유류감이다. 개인적으로 범고래가 가장 아름다운 바다포유류라고 생각한다. 그 블랙 앤 화이트의 절묘한 조합이 정말로 선명하게 나타나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이 두명의 물고리를 범고래로 비유를 해보았다.




마나카 준페이의 별 것 없는 먹이에도 좋아라하며 가끔씩 멋진 묘기와 애교도 보여주며 좋은 영화 시나리오나 맛있는 발렌타인 초콜렛 같은 사냥감도 물어다주니 이 얼마나 좋은 어장 속의 범고래들인가? 가끔 싫증내면 자기가 쓰담쓰담만 해주어도 다시 좋아라해주는 어장 속 범고래들.

안타까울 뿐이다.




이 두 명의 범고래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물고기가 나타난다.
니시노 츠카사.


솔직히 똑같은 범고래인데 호불호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3명의 히로인 중 유일하게 변화가 있는 캐릭터이다.

처음에 마나카는 니시노 츠카사와 우연히 사귀게 되었지만 그 시작이 애초에 사랑이 아닌 호감이었기에 니시노 츠카사는 어정쩡하게 진행되는 마나카에게 확실하게 헤어지자고 먼저 말을 한다.




자신의 입장도 확실히 말해주고 자신의 감정도 충분히 전달한다. 그러면서도 절제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중에 우여곡절 끝에 마나카를 다시 좋아하게 되자 마나카에게 좋아한다는 고백도 적극적으로 한다.
사츠키처럼 단순히 들이대는게 아닌 마나카가 대답을 하고 선택을 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니시노 츠카사도 작가의 정해진 틀 안에서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헬렐레해도 기다려주며 배려하는 순정파적인 성격도 띄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남자 말투를 쓰기도 하며 자신을 쫓아오는 팬클럽 남자들에게 화끈하게 호통을 치며 당당한 면모도 보인다.

적정선을 걷고 있는 여자이다.

아야처럼 조신하기도 하며 사츠키처럼 당당하기도 하며 아야처럼 배려해주고 사려깊게 대해주기도 하며 사츠키처럼 적극적이며 매력을 어필하며 접근하기도 한다.
그런데 앞의 두명과의 차이점은
무작정 마나카 준페이를 좋다고만 하지 않는다.

마나카가 고백을 해도 "난 말만으로는 못 믿을 것 같아." 라면서 한 걸음 후퇴하기도 한다.

마나카랑 헤어지고 나서 재회를 했을 때 지난 번 발렌타인 초콜렛의 답례를 하고 싶다는 마나카의 말에 딱 잘라 "됐어." 라고 말을 한다.



세 번째 컷의 츠카사의 당당한 면은 말로는 절제되어있지만 몸은 분출하고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도 엄지손가락은 주머니 밖에 나와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손바닥은 내보이니 명령이 아닌 설득을 표현하고 있다.
예쁜 여자이면서도 머리는 거의 단발이다. 만화에서도 단발과 중발을 왔다갔다하는 변화가 돋보인다.


이 만화에서 결과적으로 마나카 준페이는 니시노 츠카사를 택한다.
이러한 츠카사의 올곧은 점과 아야와 사츠키의 혼합된 중용의 미덕을 겸비하였기 때문이라고 유추된다.
물론 만화 초반에서 사츠키와 실패한 연애에서 마나카 자신만의 집착이 생겨서 좀 더 잘 하고 싶다는 의지에서 온 선택일 수도 있다.



내가 이 글을 쓴 결론은 마나카 준페이 그리고 나의 과거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어서 썼다.
고교시절당시에 마나카 준페이가 왜 니시노 츠카사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내가 너무 이 만화에 빠져있어서 그냥 객관적으로 보지도 못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에 이유가 어디있겠냐?" 라는 낭만적인 생각이 있던 시절이어서 직관적으로 츠카사를 믿었을 뿐이다. 작가의 스토리를 믿었을 뿐이다.

하지만 연애를 몇 번 해보고 대학생이 되어서 다시금 바라본 나의 고교시절 감상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현실에 비추어서 생각을 해보았고, 나의 고교시절 선택을, 작가의 선택을 그리고 마나카 준페이의 선택을 내가 분석적으로 입증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 선정적인 만화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나는 정말로 타락했구나 싶다. <딸기>는 정말 순수한 사랑을 그린 것임을 알았다. 왜냐하면 <딸기>의 주 독자층이 10대 소년이다보니 선정적인 장면들이 많았던 거지 그 속의 인물들의 사랑은 순수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야한 구도의 대부분을 연출해내는 사츠키도 이렇게 말을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애들도 이런 것과 비슷하다.
겁이 난다며 빼기 일쑤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만화는 19세가 아닌 15세 이상 연령가이다. 아슬아슬하게 경계선에 다가갔다가 결정적으로 확 빠져나온다. 이 인물들은 고등학생이고 순정파인 순수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겸손과 겸양의 미덕 혹은 밀당의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겸손의 미덕이라는 말은 저런 상황과 장소에서 쓰는 것이 아닌데 하하하하하.

성인이 되고 나니까 지금은 오히려 사츠키같은 여자가 더 좋다. 물론 몸매와 얼굴이 정말 우월해서 좋다.

성인이 되고 나니까 이 인물들이 사회인이 되어서도 친분관계를 유지된다면 어떨까하고 상상을 해보았다. 왜냐하면 마나카와 츠카사가 잘 사귀고 있다가 사츠키의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다가 마나카와 사츠키가 같이 밤새 술을 마셨는데 어느 순간 눈을 뜨고 보니 마나카는 사츠키와 같이 침대에서 아침을 맞이하게 되고, 츠카사보다는 사츠키가 더욱 더 적극적이니까 그 현란한 몸매와 기술...기술은 모르겠지만 그 현란한 몸매에 매료가 되어서 사츠키만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토죠 아야의 소설을 각색해 영화화하면서 토죠 아야와 업무적인 관계를 맺다가 사츠키처럼 다른 의미의 관계가 진행될 수도 있을 것이고...

역시 나의 머릿속은 타락했다.
근데 위와 같은 저런 스토리가 현대 사회에서는 충분히 실현가능하다. 현실적인 면모가 있다. 원래 불륜이라는게 저렇게 실현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타락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사회의 때를 한뜩 칠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영화가 있다. 바로 2012년 작 <벨 아미>인 것이다.
<딸기>를 근대상류층사회라는 무대와 불륜이라는 색채와 어른들의 세계와 행동, ADULTERY를 넣었을 뿐이다.

<벨 아미>는 기 드 모파상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가난한 군인이면서 외모 말고는 별 볼 일 없던 조르주(로버트  페틴슨)이 친구 찰리를 통해 우연히 사교계에 진출하면서 부인들과 연이 트게 되고 부인들을 이용해서 권력을 향해나아간다는 이야기이다.

<벨 아미>를 보나 <딸기>를 보나 그 기본 플롯은 비슷하다. 시대적 배경과 인물에 대한 관점이 다를 뿐이지. 결국 <딸기>의 스토리는 이 영화 <벨 아미>와 비교해보면 정말 순수해보이는 것도 납득이 된다.


<포제션>이라는 영화도 있다.

<포제션>은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영화로 2002년 작인데 정말 명작이다. 한 여자만을 바라보았다고 알려진 시인 랜돌프 애쉬. 그리고 후대에 랜돌프 애쉬를 연구하는 영문학자 롤랜드 미첼은 우연히 도서관에서 한 여자만을 바라봤다고 알려진 애쉬가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정말로 열정적인 사랑을 느끼고 고백을 하는듯한 편지를 발견하게 되고 그녀의 후손이자 학자인 베일리 모드(기네스 펠트로 분)와 그 탐구에 나선다. 애쉬의 사랑은 크리스티벨 드 라모트라는 여류시인이었고 이들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미첼과 모드의 로맨스도 같이 시작이 된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어른의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로 로맨스를 가장한 불륜의 막장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어른의 사랑이란 것도 하나의 로맨스가 아닐까하는 감독의 견해도 영화에서 종종 보여진다. 특히 <포제션>같은 경우 유부남 애쉬왕 라모트의 밀애여행은 정말 낭만적으로 그려지고 서로가 불륜임을 알아도 이 감정에 충실해지기로 마음먹고 시작되는 본격적인 사랑의 나눔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매우 아름답게 그려진다. <벨 아미>도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 하던 부인들이 비록 다른 외간남자이지만 자신의 사랑을 추구한다는 면에서 낭만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벨 아미>는 권력 지향적인 한 남자와 세 유부녀의 타락한 이야기다보니 어느 누구라도 그 사랑 이외의 목적에 비판을 가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포제션>도 비판을 가하게 되지만 그 사랑이 <벨 아미>처럼 수단적이지 않다.
랜돌프 애쉬와 라 모트. 이 두 시인의 사랑. 시적인 감정과 낭만의 홍수.
낭만주의 시인 중에서 '로드 바이롱' 은 희대의 바람둥이였다.
낭만주의 시인 중에서 '퍼시 바이셔 셸리'는 elopement 즉, 사랑의 도피를 하였다.

어른의 사랑은 낭만이 될 수 없는 것일까?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그 결말은 언제나 비극이라는 것이다. 청춘로맨스에게는 희망을 주지만 불륜로맨스에게는 절망을 안겨준다.

극 중에서 베일리 박사와 미첼 박사의 사랑도 같이 진행이 되는데 영화 초반부에 베일리 박사는 자신이 연애 중이나 잘 안되는 중이라는 대사가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지나면서 베일리 박사는 어느새 완전 솔로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극 중반에 베일리 박사 집에서 다른 남자가 나오기도 하지만 미첼 박사는 남자가 나가길 기다렸다가 베일리 박사 집에 가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두 가지의 사랑 모두 낭만이라는 이름 하에 가장이 되어버렸다.

<벨 아미>와 <포제션>. 어른의 사랑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두 가지 형태가 아닌 가 싶다.
권력 혹은 이익적인 관계 속 신체적 관계.
그리고 당사자에게는 로맨스인 어른의 사랑. ADULTERY.




<딸기>는 지금 읽어도 공감가는 면모가 또 하나 있었다.
진로였다.
대학교 오면 진로고민은 안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대학교 오니 진로에 대해서 더욱더 고민하게 되고 그에 대한 여러 프로그램이 더 많이 있었다. 대학교에서 '진로개발세미나', '진로설계세미나'는 필수교양이며 '취업의 진로와 선택', '창업의 이해', '직업세계의 이해' 와 같은 아예 <취업교양>의 카테고리가 따로 존재할 정도이며 그 정도는 학창시절보다 더 심하다고 느낀다.

문제는 대학생들에게 꿈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거나 점수 맞춰 대학교, 점수 맞춰 특정 전공에 오면서 같이 사라졌고, 오직 취업만을 생각하는 분위기가 주류세태이다.
대학교 4학년인데도 뭘 할지 몰라서 휴학을 내거나 아무 기업에나 이력서를 넣거나 그냥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즐비하다. 정말 2학년인 내가 봐도 남일이 아닌 정도이다.

<딸기>에는 그 꿈과 진로를 확실하게 정한 아이들이 나와서 자신의 꿈을 나아가고 꿈이라는 단어를 어른이 되서도 서슴없이 쓰며 나아가고 있다.
대학생인 내가 봐도 이들의 확실한 진로와 꿈은 정말 부러울 정도이다.
마나카 준페이는 자신의 꿈인 영화감독을 실현하기 위해 영상연구부를 직접 만다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콩쿠르에 나가서 수상을 하기도 하고 영화사무실에서 스카웃도 받는다. 토죠 아야는 고등학생 때 소설가로 등단을 한다. 기타오오지 사츠키는 집안의 가업을 물려받는다. 니시노 츠카사는 파티셰라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프랑스 유학까지 갔다온다.

일본의 교육제도와 한국의 교육제도의 다른 점이기도 할 것이고 만화의 특성상 해피엔딩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
일본은 중학교 입시, 고등학교 입시가 따로 있는데 우리 처럼 단순히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가는 인문계 고교가 아니라 마치 대학교처럼 수업을 선택해서 인문계 대학 진학반과 취업진학반으로 나뉜다. 같은 고등학교 안에서도.



아는 선배 누나도 4학년인데 공무원 시험 준비를 2년이나 하다가 지금 4학년으로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데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어서 일단 지원을 하고 안 되면 대학원이나 학원강사로 취직을 할 거라고 한다.
이런 선배가 한 두 명 있는게 아니다. 오히려 많다고 할 정도이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된다.
대학원 진학도 시험을 쳐서 합격하는 만큼 어려울 뿐더러 학비 문제도 있고 사회에는 나와 비슷한 스펙과 나와 비슷한 능력의 사람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에 오게끔만 교육이 아닌 훈련을 받았지 무엇이 되라고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 무엇이란 것도 아주 한정적이다.

의사, 변호사, 검사, 판사. 교사. 공무원.

왜 로스쿨 다닌다고 하면 우수한 학생 취급을 받으며 디자인과 다닌다고 하면 힘든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로스쿨 다니면서도 간통죄를 저질러서 퇴출당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각종 디자인 공모전에 수상하고 좋은 디자인 회사에 입사해서 실력을 의기양양하게 펼칠 수도 있는데?

<딸기>에서 그들의 뒷 이야기는 모른다. 사회초년생이 되어서 꿈을 향해 막 시작하는 걸로 끝난다. 이것이 진정한 시작인데.
결국 소년만화란 한 소년의 판타지와 이상향에서 끝나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분석적으로 지루하게 풀어놓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알콩달콩하기도 하고 야시꾸리하기도 한 재미있는 만화책이다.

여자에 대한 남자의 대표적인 이상향들을 억지반영시키고 추운겨울에도 각선미를 드러내고 다니는  만화 속 여자주인공들은 지금 보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남성주의가 만연해있음이 보인다. 어찌보면 위험한 만화책이기도 하다. 소년만화에 등재할 정도인 이 상황을 거꾸로 보면 남자들의 기가 많이 죽어있음을 보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긴 에세이를 쓰면서 남긴 결론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딸기>와 같은 순수한 사랑은 이제 스토리로만 존재하며 없다고 느끼는 내가 속물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딸기>인물들만큼 자신의 꿈을 당당하게 말하며 노력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P.S  <딸기 100%>보고 이렇게 장문의 에세이를 쓰는 나도 참 별난 것 같다. 그것도 굳이 영화에세이라고 포장하면서...하하


P.S  <벨 아미>를 곁들였으므로 영화평론은 아니어도 영화에세이로 인정~~

P.S  <포제션>을 곁들였으므로 영화평론은 아니어도 영화에세이로 인정~~


 

이름(성)의 유래

작중의 캐릭터 네이밍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특히 메인 히로인 4명을 필두로 방향이나 위치에 관련된 성이 많다. 다음과 같다.

마나카(真中)
〈한가운데〉라는 뜻
토조(東城)・니시노(西野)・키타오오지(北大路)・미나미토(南戸)
마나카(真中)를 중심으로〈동서남북(東西南北)
오오쿠사(大草)・마나카(真中)・코미야마(小宮山)
순서대로〈대중소(大中小)〉. 인기있는 정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마나카(真中)・소토무라(外村)
〈안(中)과 밖(外)
아마치(天地)
〈하늘과 땅(天地)
하시모토(端本)・소토무라(外村)・무카이(向井)
〈끄트머리(端)・밖(外)・건너편(向かい, '무카이'라고 읽는다)
미나미토(南戸)・사이온지(西園寺)・키타하라(北原)・히가시오(東尾)
소토무라 주최 미팅의 여자쪽 멤버.〈동서남북(東西南北)
마나카(真中)・무카이(向井)・우라사와(浦沢)・사타케(左竹)・미기시마(右島)
입시학원 멤버. 마나카를 중심으로〈좌우(左右)〉와〈건너편(向)〉〈뒷쪽(裏)
니시노(西野)・히구레(日暮)
〈서쪽(西)에서 해가 진다(日暮, 일몰이라는 뜻)〉에서 유래하고 있다.
소토무라(外村)・우치바(内場)
19권 권말 부록의 커플.〈안밖(内外)
시라토리(白鳥)・쿠로카와(黒川)・사토(佐藤)(교사)
교사는 〈색〉이 이름에 들어가 있다. 〈흰색(白) 검은색(黒) 연보라(藤)
콘도(近藤)・토야마(遠山)
〈오쓰! 버거(사츠키와 마나카의 아르바이트 가게)〉의 점원。〈가깝고(近) 멀다(遠)


이미지출처 : 학산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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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성적흥분(에로티시즘) <무서운여자>&<오펀> --------------------------




공포영화를 보면 항상 나오는 장면은 남녀간의 섹X장면이라던가 여자의 나체씬이다. 그리고 카메라 퍼스펙티브는 누군가가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을 불러일으켜서 관객으로서는 관음증적인 감정과 동시에 주인공에게 호의적인 입장으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는 듯한 간접적인 불쾌함에 오묘한 감정을 느낀다.

공포영화에서 '여자WOMAN' 라는 캐릭터는 아주 중요한 캐릭터이다.
일본의 영화 <무서운 여자(2006)>가 이러한 점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무서운 여자>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담은 옴니버스 필름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혼경력이 있는 남자와 곧 결혼식을 올릴 '카나코' 라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약혼남이 집까지 바래다주고 집에 오는데 기묘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쫓아오는 꿈과 환상을 오고가는 이상한 이야기에 휘말린다.


두번째 이야기는 작은 정비소에서 일하는 '세키구치'라는 남자는 정비소 주인이 반 강제로 자신의 여동생과 소개팅을 시키는데 모습이 기이하다. 날씬한 다리는 훤히 드러냈는데 상체는 이상한 포대기를 뒤집어 썼고 이상한 울음소리도 낸다. 이런 이상한 사람과 소개팅을 해야한다.



세번째 이야기는 도쿄에서 이혼을 하여서 아들과 함께 외갓댁에 내려온 이혼녀의 이야기이다. 아들은 주위 사람들이 이 집을 '광기의 집' 이라고 부르는데 의구심을 품고 이 집에 온 이후로 어머니의 행동도 이상해진다.

<무서운 여자>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세 편의 옴니버스 이야기에 "여자"가 나온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은 두 번째고 일단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정말 끌렸다.







이런 여자는 말고ㅋㅋㅋ


첫 번째 이야기에서도 카나코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여성캐릭터이다. 이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감독은 여성미를 화면에 뿌려놓는다. 특히 제일 티가 났던 부분은 아침 출퇴근 길에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두침침한 정장차림인데 반해 카나코는 밝은 베이지 색의 원피스로 여성미를 한껏 뽐낸다.


그리고 귀신이 카나코를 붙잡는 장면에서 놓이는 손의 위치가 이후 전개되는 감싸는 부위들이 정말 에로티시즘을 유발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야했다. 굳이 성적으로 민감한 가슴, 목덜미, 귀, 허리 등의 부위에 노골적으로 터치(?)가 가해졌다. 여자귀신인데도. 여자귀신이라서 이런 데를 만지는건가?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미니스커트에 다리만 내놓고 다니는 이상한 여자와 데이트를 하게 된 남자. 세키구치는 차량 운전을 하면서도 여자의 다리에 눈길이 힐끔 간다.



그녀의 쌔끈한 다리를 보는데 스커트 안에서 여치(!)가 기어나온다.
다리에 신체적 접촉을 하고 싶은 세키구치의 욕망이 여치로 표현된 것인데 일반적인 손이 아닌 여치라는 곤충이 스커트 안에서 나오니 정말 만지기 껄끄럽다. 신체적 접촉 욕망이 사라질 정도이다.

집에 데리고 와서는 노골적으로 그녀의 다리를 탐하기 시작하다가 본격적으로 공포스러운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한 명의 아들을 데리고 사는 아줌마가 아닌 '이혼녀', '돌싱녀'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면서 오히려 어머니여야 할 존재에게 성적 코드를 마구마구 심어준다. 극 중에서는 털이 수북하여 마초적이면서 잘 생긴 아저씨가 종종 집에 찾아오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이 그림을 보면서 아들에게 이상한 집착을 드러내는데 그림조차 어머니라는 존재가 옷을 거의 벗은 채로 그려져있다.


이 영화에서는 아예 공포영화라는 점보다 앞서서 "여성성에 가미한 에로티시즘"이다. 약혼녀, 사장님 여동생, 돌싱녀 라는 소재에 에로티시즘을 가미하는데 애초에 이런 여성들에게는 에로티시즘을 품는 것이 거의 금기이다. 약혼녀 같은 경우 임자가 있어서 곧 결혼할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으로 표현하고 약혼남을 첫장면 빼고 안 보여주니 약혼녀라는 인식도 망각할 정도이다. 사장님 여동생도 솔직히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되는 존재이고 공은 공이고 사는 사와 같은 관계를 위해서도 웬만하면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관계이다. 그런데 오히려 사장이 여동생을 소개팅 시켜주니 신뢰를 받는 것 같아 좋기는 하겠지만 이상한 여자이다. 사장님 눈치 때문에 뿌리치지도 못 하고 좋아하자니 싫다. 돌싱녀도 이혼을 했고 애도 딸렸지만 여전히 젊고 예쁘고 몸매도 좋다.



금지되어 있는 여성이 아닌 금기시 된 여성에게 에로티시즘을 가미하면서 기묘한 공포감을 조성하니까 이 영화는 [그로테스크]를 절실하게 보여준다.


즉, 남성에게 금기시된 여성성에 에로티시즘을 가미하며 동시에 공포심을 조달하는 [그로테스크] 감정을 감객에게 전달해준다.



무서움과 거북함을 주면서도 남성관객에게는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제 3의 내적상태'에 이르른다.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 당시 대문호 빅토르 휴고가 주창한 [그로테스크]. 비극도 희극도 아닌, 위엄과 경망도 아닌 그렇다고 중간도 아닌 제 3의 상태. 1827년 빅토르 휴고는 <크롬웰> 서문에서 프랑스 낭만주의를 선언하였다. 바로 '드라마DRAMA'를 창조해낸 것이다. 드라마라는 것은 흔히 현대에서는 TV에서 방영되는 연속극으로 통용되는데 사실상 드라마는 비극과 희극을 동시에 가진 극이라는 뜻이다. 알다시피 드라마에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간의 갈등(비극)과 알콩달콩한 연애 혹은 유머(희극)이 섞여서 방영이 된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불규칙한 비극과 희극의 자극적 조화에 중독이 되어서 찾아보게끔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드라마는 19세기 당시에는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이전에는 희극이면 희극, 비극이면 비극으로 일관성을 매우 유지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낭만주의 이전에 영문학 빅토리아 시대 당시의 '셰익스피어 극문학' 일 것이다. 셰익스피어 4대 희극, 셰익스피어 4대비극 이런 식으로 갈려져 있다. 빅토르 휴고가 드라마라는 개념과 함께 창출해낸 개념이 '그로테스크GROTESQUE'이다. 두 영역간의 혼합을 그린 것이다.

<무서운 여자>는 에로티시즘과 호러의 그로테스크한 드라마를 잘 보여주었다. 스토리가 단편 옴니버스다 보니 구성이 치밀하지는 않았지만 공포영화의 특성을 잘 살려주었다.




이를 보면 공포영화에는 항상 '남녀간의 애무장면'이 나온다.
영화 <스크림> 오프닝에서는 집에 혼자 있는 여자(!)에게 수상한 남자의 전화가 온다. 그리고 수화기를 통해서 정체불명의 남자의 혀가 여자의 귀를 핥는다. 귀라는 부위가 성적으로도 아주 민감한 부위인데 성적 애무의 주요 도구(?)인 혀로 핥는 걸로 오프닝을 시작하니 이 또한 공포심과 성적자극을 동시에 한다.
<13일의 금요일>에서도 아무도 없는 곳에 캠핑을 와서 텐트 안에서 남녀가 껴안고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수상한 그림자가 나타나 전기톱으로 텐트천을 가른다.
<이블데드 리메이크(2013)에서도 여주인공 '미아'의 치마 안으로 괴상한 촉수같은 생물이 꼬물꼬물 들어가 미아의 몸 안으로 사라진다.
<이든 레이크>에서도 남녀 커플이 캠핑장 텐트에서 하는 장면이 있는 이후에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스크림 오브 벤쉬>의 포스터도 젖가슴이 거의 보이는 알몸의 여자가 빨강망토만 한 장 걸치고 있다.
<트라이앵글>이라는 영화의 포스터에는 금발의 섹시한 언늬가 도끼를 쥐고 피 칠갑인 갑판 위를 걸어가고 있다.
<엑소시스트>에서는 발육기의 소녀를 침대에 묶어놓고 엑소시즘을 거행한다.

에로티시즘과 공포감의 동시배치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영화 <오펀 : 천사의 비밀>도 마찬가지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케이트'는 남편 '존'과 상의 끝에 세 번째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심하고 세 번째 아이 에스더가 오면서 집안에는 오싹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영화 <오펀>에서는 부부간의 금슬이 좋다는 것을 표현이라고 하려는 듯 여러 키스 장면은 물론이고 부엌에서 그걸 하기도 한다. 그리고 굳이 이런 섹시한 잠옷을 입히기도 한다. 기다렸다는듯이 다음 장면에서는 부부관계를 시작한다.



공포영화라는 것이 예전에 <웹툰> 평론으로 공포감정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공포란 앞뒤가 맞지않거나 일반적 상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기묘한 상황에 대한 낯선과 불안함이라고.
오늘 이 두 편의 공포영화를 보고나니 이런 낯선과 불안함이 있지만 또 다른 장치로 낯선감, 불안감, 공포감을 고조시키는데 바로 '섹X'인 것이다.



이 성적 요소는 관객으로 하여금 심장박동수를 올려서 다른 의미에서의 흥분을 고조시킨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 소리나 무서운 장면과 함께 빵! 터트리는 것이다. 또는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갑작스런 상황의 반전에 그 충격은 더 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문화권에서나 지나치게 노골적이어서 선정적인 성적 주제는 금기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화면 상에 성적 묘사가 다분한 장면이 나오니 평소 일반적인 생활과 약간의 낯섬과 불장난을 저지르고 있지만 너무 드러낼 수 없는 불안감에 조금 조마조마해지기도 하고 공포감은 이런 마음의 빈 자리에 봇물을 퍼부어주는 것이다.

즉, 에로티시즘은 공포감 조성을 위한 장치인 것이다.


에로티시즘과 공포감정의 상관관계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낯선 불안함에 근원을 둔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기.
이성에 대한 미지의 영역은 언제나 새롭다. 그러다보니 낯설기도 하다.
공포도 마찬가지이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불안감.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두 가지는 모두 본능이면서도 학습이 된다.

에로티시즘의 학습 같은 경우 일본의 예가 대표적이라고 들 수 있다. 여자의 가슴에 대한 성적상징은 서양권에서는 어느정도 있었지만 동양에서는 여성의 가슴을 성적상징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기 위한 것으로 밖에 거의 보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근대 개화 이전 여성의 음부를 가리키는 단어는 100여개가 넘는 한편 여성의 가슴을 가리키는 단어는 6개 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개화 이후 서양문화가 들어오자 여성의 가슴을 가리키는 단어는 43개로 늘어났다.

공포감정의 학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드라큐라, 뱀파이어, 늑대인간은 분명 조선시대 사람들은 괴물정도로만 여겼지 처녀귀신과 같은 공포의 대상으로까지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람들은 약간의 정서적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공포의 대상으로 학습이 되어있다.



공포영화에서 거의 여자가 무서운 역할인 이유는 여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히스테리'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히스테리란 스트레스와는 다른 여성이 본능적으로 가지는 정신적 고통인데 프로이트는 여자만 히스테리가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그 이유가 여자들의 남근지배욕망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여자에게는 남근이 없으므로 그에 대한 정신적 고통이라는 것이다. 일각에는 여자는 월경과 같은 생리적 불편함에서 오기도 본다고 하고 일각에서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남성의 이데올로기 속에 지배받다보니 억압된 욕망이나 억압심의 표출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는 진화심리학적으로 여성은 선사시대때부터 동굴생활을 오래하다보니 동굴생활을 하면서 여성들 간에 있는 기묘한 기싸움과 눈치싸움이 있기 마련이고 그에 대한 감정의 억압이 남성보다도 뛰어나다. 감정의 지나친 억압에 따른 부작용이기도 하며 원래 신체적으로 남성보다 작은 체구와 약한 힘에서 기인하여서 히스테리가 발생한다고 보기도 한다. 또는 신체적 특징이 머리가 빨리 자라고 임신을 하는 구조에서 인내력이 남성보다 본능적으로 더 발달하여서 그에 대한 히스테리가 오는 것이기도 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히스테리는 남성에게는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는 두려움이며 여자들에게도 다른 여성의 히스테리는 힘든 존재이다. 결국 이런 여성만의 특유의 히스테리적 특성이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어서 공포심을 유발하는 촉진제가 되다보니 여자 귀신이 많은 게 아닌가 싶다. 남자 귀신은 주로 칼이라던가 도끼와 같은 폭력적인 물리적 힘을 앞세우는 반면 여자 귀신은 정신적 두려움과 불안감을 안겨주니 여자 귀신은 히스테리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하고 남자 귀신은 남성의 폭압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우리는 공포영화를 보면서 일상생활에서 탈피하여서 간접적으로 낯설고 두려운 감정 본능을 되내이면서 또 다시 학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공포영화가 주는 장점이면서도 단점이다. 너 되게 낯서니까. 공포영화를 두번 보면 낯설지 않으니 전혀 무섭지가 않으니까 좋은 영화가 될 수가 없는 일회용영화인 것이다. 물론 명작 공포영화도 있지만 다른 장르에 비해서 명작의 비율이 터무니없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공포영화를 보면서 에로티시즘을 파악하는 나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귀신같은 거 별로 안 무서워하는 강심장이거나
무서운 것을 제쳐두고 굳이 신동엽처럼 섹드립을 하려는, 에로티시즘을 파헤치려는 탐구자(?)이거나.




P.S 글이 너무 선정적인가?? 최대한 자제해서 썼는데ㅋㅋ



이미지출처 : 다음영화
추천문헌 : "공포영화를 보면 이해 안 되는 것들 http://myworlding.egloos.com/1129124 "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다 --------------------------

  "저는 독재자 국가에서도 한 번 살아봤어요. 항상 감시를 하죠. 무관심한 민주주의와는 달라요. 예술가인 저에겐 좋은 경험이 되었죠."

  영화 <파리 5구의 여인>을 보았습니다.
  영문과 대학교수 톰 릭스(에단 호크 분)은 프랑스인 아내와 결혼을 하여 딸도 있었지만 제자와의 스캔들로 대학에서도 쫓겨나고 이혼하여 아내와 딸이 파리로 건너오죠. 그래서 그도 딸이 보고 싶어 파리로 오지만 아내때문에 함부로 접근을 못 해서 절망에 빠지고, 전 재산도 도둑맞습니다. 결국 뒷골목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지내는데 범죄의 소굴같은 곳입니다. 어느날 서점에 갔다가 작가인 자신을 알아본 서점주인이 톰 릭스를 문예모임에 초대합니다. 그저그런 만남 속에 갑자기 묘령의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녀는 헝가리인 번역가 '마지트(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분)'를 만나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여인숙 직원인 아니아(요안나 클리크 분)과도 만남을 가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화장실때문에 싸운 적이 있는 옆방의 흑인남자가 살해를 당합니다. 톰 릭스는 조사를 받고 마지트를 알리바이로 제시하는데 마지트는 1991년에 자살한 여자라는 것입니다. 톰 릭스는 혼란에 빠집니다.


  글 맨 처음에 나오는 대사는 톰 릭스가 문예모임에서 만난 한 작가가 말한 내용입니다. 이 작가는 독재정권이라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자신에게 예술가적 영감을 불어넣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대사가 끝나는 순간, 마지트가 릭스의 눈에 띄죠. 이것은 톰 릭스에게 하나의 또다른 상황을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마지트는 '유령'입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파리 5구의 여인>을 2011년에 영화화한 작품으로 더글라스 케네디가 직접 각본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소설 <파리 5구의 여인>과는 조금의 차이와 미묘하게 다른 포커스가 있습니다.

  소설이 톰 릭스와 마지트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영화는 톰 릭스의 절망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추죠. 스캔들로 대학교에서도 쫓겨나고 아내와 이혼을 당하고 딸아이에게는 접근도 못 하고, 재산을 도둑맞아 뒷골목 여인숙에서 지내는데 얻은 일이라고는 이상한 수위 직. 그리고 터지는 살인사건연루와 기묘한 정사.

  위의 말 처럼 마지트는 릭스에게 이런 말을 하지요.

  "비극적인 사건만 생기면 당신은 정상에 오를꺼야. 성공한 작가들을 봐. 다들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뤘어. 파리 뒷골목을 전전하는 뒤틀린 인생. 잘만 쓰면 대단한 비극이 될거야."


  이 영화는 '예술가에게 일어나는 비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비극 속 예술가의 고찰과 성찰.

  영화는 그 결말을 오픈 엔딩으로 끝냅니다. 단순한 그 기묘한 로맨스와 인과관계 없는 현실세계 속에서 톰 릭스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는 겨우 책 한권을 펴냈을 뿐인, 초짜작가이니까요. 그런 그에게 엄청난 비극세계가 찾아오니 그는 영문을 모를 바입니다. 그는 결국에는 이겨낼까요?? 결말은 열린 결말이지만  유령인 마지트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치는 식으로 끝이 납니다. 그는 이 비극을 승화시키지 못하고 패배한 예술가가 된 거지요.

  그는 왜 패배했을까요??
  그는 승화, 즉 카타르시스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그 비극을 무심 혹은 희극으로 배출을 못 했기 때문이죠.

  배출을 못한 그 주요 이유로, 그는 모든 유혹에 넘어갑니다.
  딸 아이와의 만남을 바란다면, 접근금지 명령 및 양육권을 획득하기 위해 작품 집필에 집중을 하거나 새로운 직업을 찾거나 해야 하는데 단순히 딸 아이와 만나고 싶은 마음에 몇 번씩이나 아내 몰래 찾아갈 뿐이죠. 욕망에 이기질 못합니다.
  마지트와 만날 때에도 마지트가 집으로 오라는 유혹에 바로 전화를 하고 찾아가서 ㅇㅇ 을 하지요.
  여인숙의 폴란드 여직원 아니아도 여인숙 주인 세자르의 여자인데, 그녀의 흠모와 애정표현에 하염없이 끌려갈 뿐이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안 내리는 옆집의 남자에게도 별 일 아닌 것도 순간의 분노에 잡혀서 따지지요.
  제자와의 스캔들도 아마 마지트나 아니아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그 제자가 먼저 유혹을 했을 것이고 또 이기지 못했겠죠.

  그는 결국 모든 유혹에 이기질 못 한 겁니다.
  영화 <도리안 그레이>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유혹을 이기는 방법은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도리안 그레이의 결말을 어떻게 되는가요?? 도리안 그레이는 자신의 추악한 초상화 앞에서 무릎꿇고 절망하며 초상화를 칼로 찌름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유혹과 쾌락을 쫓은 그에게 남은  것은 '순수한 비극' 뿐이었습니다.

  톰 릭스도 자신의 비극을 작품에 담담히 혹은 비사체로 담아내어 승화시키거나, 단순히 분노하여 여자나 쫓는 것이 아닌 자신의 미래를 쫓았을 것입니다. 톰 릭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겁니다.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다." - 호레이스 월폴

  이 대사는 하나하나 그 사건에 감정에 휘말리면 인생 자체가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 지하철이 늦게 와서 지각을 했습니다. 평소와 똑같이 나왔지만 지하철 사고로 지각을 하였고 선생님이 나를 혼냅니다. 혼나는 그 순간의 감정에 치우치면 분명히 이것은 비극입니다. 평소와 똑같이 나왔는데 혼이 났으니까요. 근데 생각을 해보면 웃기잖아요?? 평소와 같이 지하철을 타려고 나왔는데 지하철이 없다니?? 얼마나 황당해요?? 그리고 늦어버리고 선생님이 혼을 내고... 황당해서 웃기지 않아요??


  톰 릭스는 물론 이렇게 사소한 사건을 희극으로 무마시킬 정도로 간단한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예술가이며 딸 아이를 위해서 작품을 집필하려면 자신의 비극도 희극으로 승화시키며 작품을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죠.
  영화는 결국 톰 릭스의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담담하고 고요한 숲과 대비시켜 톰 릭스의 불안한 분위기를 대조시키죠. 그에게 필요한 것은 '포레스트 라이프' 와 같은 담담한 마음으로 상황을 대처하는 것이지요. 과음만 막막 지르고, 여자와 노닥거릴게 아니라.

  혹독한 상황 속 자신이 그 상황을 희극이냐 비극이냐고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달린 문제입니다. 너무 심하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인생의 절망을 걷다가 로맨스를 만난 비운의 작가 이야기, 영화 <파리5구의 여인> 이었습니다.




 P.S 아니아 역의 요안나 쿨리크 예쁜 것 같아용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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